얼마 전 tvN에서 방송을 시작한 <트렌드TV 마릴린>의 메인 MC는 한대수와 박새롬이다. 맞다, ‘한국 록의 살아있는 전설’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바로 그 한대수다. 1948년에 부산에서 태어나 청소년기 내내 실종된 아버지(그의 부친은 핵물리학자였다)를 찾아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동안 1960년대 미국문화를 온 몸으로 경험하고 코리아 해럴드 기자로 지내며 작곡한 음악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곡으로 1974년에 1집 <멀고 먼 길>을 발표하며 한국 대중음악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 한대수 말이다. 1974년과 75년, 1, 2집을 발표한 뒤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한국을 떠났다가, 15년 뒤 민주화가 된 이후에야 3집을 발표했고, 한국 록 음악의 부흥과 포크 리바이벌이 인기를 끌던 1990년대 후반을 지나는 동안 그는 언제나 이 땅에는 없는 사람이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이었다. 그런 그를 21세기에 다시 대중매체로 불러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환갑의 나이에 얻은 딸, 양호 때문이었다. 그래서 2008년 벽두부터 케이블TV의 트렌드 프로그램의 메인 MC로 출연하는 것은 다소 뜬금없지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혹은 서울에서 그의 존재감이 여전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이를테면 그는 1948년부터 2008년까지 6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세기의 문화적 감수성을 관통한 사람인 동시에 시대적 경험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를 ‘명곡 ‘희망의 나라’를 부른 가수‘라고만 소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라지지 않는 아티스트의 ‘현재’

한대수는 한때 명곡을 만들어낸 박제된 신화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를 사는 아티스트다.

한대수의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계보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독창적이며 자기완결적이다. 독보적이라고 해도 좋을 이런 특성은 ‘물 좀 주소’나 ‘행복의 나라’, 그리고 ‘고무신’과 ‘여치의 죽음’ 같은 초기작들을 통해 이미 완성되었다. 당시 트윈폴리오나 라나에로스포 등으로 대변되던 ‘예쁜 포크송’과는 전혀 다른 방법론으로 사운드에 접근한 한대수의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계는 물론 당시 정권으로서도 이해불가능한 정체불명의 어떤 것이었다. 대부분 미지의 것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그런 이유로 폭력의 희생양이 되듯이 당시 한대수의 음악과 존재도 정치권력으로부터 탄압받았다. 그의 1집과 2집 앨범이 금지곡으로 가득한 이유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였지만, 그 근거는 ‘유해한 음악’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정치권력으로서는 보편적이어서 순응적인 아르페지오나 스트로킹 주법 대신 ‘제 맘대로 긁어대는’ 통기타 연주를 따라 흐르는 거칠고 탁하여 위악적인 한 대수의 보컬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989년 3집 <무한대>를 발표하며 현재까지 여전한 음악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그는 단순하게 ‘정치적으로 억압받았던 60년대의 포크-록 싱어 송라이터’라는 카테고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1989년 발표한 3집 앨범은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과 함께 작업한 앨범이었다. 1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의 음악은 시대적 관점에서 개인적 관점으로 이동했고, 그것은 ‘첫 번째 부인과의 이별’이라는 동기가 작용한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 앨범은 국내에서 거의 처음으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개척하며 이병우(기타)와 송홍섭(베이스)이라는 최고의 세션을 비롯해 손무현(기타), 김영진(베이스), 김민기(드럼) 같은 신성들과 함께 작업하며 당대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인 앨범이었다. 1990년대를 지나며 ‘한국 록 다시 부르기’ 같은 방식의 계보 작업이나 ‘7080 콘서트’같은 형식의 포크 리바이벌이 인기를 끄는 동안에도 한대수는 대중적 반향을 얻는 대신 당대에 독특한 입지를 구축한 국내외의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적 고민의 깊이를 더해갔다. 이를테면 한대수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의미있는 음악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그가 한때 탄압받은 경험을 가진 대중음악가라서도 아니고, ‘희망의 나라’같은 명곡을 불렀던 포크 가수라서는 더더욱 아니고, 신중현과 더불어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칭호를 받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호흡하며 생존하고 있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2006년까지 모두 12장의 정규 앨범, 두 장의 라이브 앨범, 한 장의 베스트 앨범을 비롯해 어어부프로젝트나 스왈로우(허클베리핀의 이기용) 등과 함께 작업한 앨범들이나 자서전과 사진작업들까지 그가 참여하거나 만들어온 앨범들과 창작물들은 언제나 ‘현재’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것은 한때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사’들이 여러 이유로 사라진 것과 비교했을 때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창작자의 딜레마이자 욕망이기 때문이다.

한대수, 그의 존재감의 근원

한대수는 7개월이 된 딸 양호를 키우기 위해 <트렌드TV 마릴린>의 출연을 결심했다.

그래서 한대수가 tvN의 <트렌드TV 마릴린>의 메인 MC를 맡은 것은 상징적이다. 한창 활동하던 1970년대 TBC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경험에 대해 ‘TV라는 매체의 분위기도 싫었지만, 사실은 방송 자체가 싫었다’고 밝혔던 그가 TV 쇼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나선 것은 스스로 밝힌 대로 이제 7개월이 된 딸 양호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은 그에게 여전히 ‘생존’이라는 것이 그의 삶에 중요한 동기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에게 음악을 비롯한 사진, 글과 같은 창작 작업이란 ‘생존’의 수단이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본능적으로 저항했고, 민주화 이후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된 한국사회에서 그는 앨범이 팔려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에 제압당했다. 그에게는 시대를 초월해 언제나 지속 가능한 삶과 살아남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따라서 그런 그를 ‘살아있는 한국 록의 전설’이라는 신화적인 수사에 가두는 것은 부당하다. 온당한 평가와 신화적인 해석은 항상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대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밟아온 예술적 성취를 거론하는 것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지금 그가 생존하기 위해,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무언가와 지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21세기의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과 싸운다. 한국 사회가 70년대와 80년대의 정치적 트라우마를 제거하기 위해 당시의 모든 사회문화적 활동들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덧입히는 동안 한대수는 여전히 한국과 미국의 경계를, 방랑과 정착의 경계를, 순응과 저항의 경계를 오가며 그 모든 것들과 싸운다. 결론적으로 올해 예순이 된 그는 7개월 된 딸아이의 미래를 위해 현재와 싸우고 있다. 다만 그 사실만으로도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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